1982년 레바논 전쟁은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갈릴리 평화 (Peace for the Galilee)작전으로 불렸으며, 이후 이스라엘은 레바논 내전 또는 제1차 레바논 전쟁으로 불렀다. 1982년 6월 6일 이스라엘 방위군(IDF)이 레바논 남부를 침공하면서 시작됐다. 이 침공은 레바논 남부에서 활동하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와 이스라엘 방위군이 국경 양쪽에서 민간인 사상자를 낸 일련의 공격과 반격에 이은 것이었다. 군사 작전은 Abu Nidal 조직원들이 주영 이스라엘 대사 Shlomo Argov를 암살하려고 시도한 후 시작됐다. 이스라엘 총리 Menachem Begin은 사건에 대해 아부 니달의 적인 PLO를 비난했고 이 사건을 침공의 빌미로 삼았다.
종파 정체성이 저지른 레바논 100년 내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18개 종파가 한데 묶인 레바논은 1943년 국민협약으로 유기적 결합에 이르고자 했다. 그러나 종파의 벽을 넘지 못했고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렸다.
레바논 문제의 본질은 경제가 아니다. 정치의 실패다. 연원은 100년 전 오스만제국(오토만제국) 패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영국과 프랑스는 패전국 오스만제국을 재편하며 신생국을 만들었다. 현대 중동의 시작이다. 영국은 요르단과 이라크 왕국의 수립을 주도했다. 혁명의 후예를 자임하는 프랑스는 레바논과 시리아 공화국의 탄생을 도왔다. 1926년 프랑스는 자국의 제3공화국 헌법을 본떠 레바논 헌법을 만드는 등 법과 행정 시스템을 정비하면서 레바논 건국을 준비했다. 변수는 종교 파벌이 너무 많았던 레바논이라는 문제였다.
프랑스는 ‘마운트 레바논(레바논 중부 지역)’만을 염두에 두고 레바논 건국을 추진하지만 레바논 남부와 북부엔 각각 드루즈파(이슬람 계열)와 마론파(기독교 계열)를 세력까지 품으로 베이루트를 포함한 북부 트리폴리, 시돈과 티르 등 지중해 해안 거점도시와 베카 계곡, 남부 리타니강 이남 지역까지 이른바 대(大)레바논, 현재 레바논의 영토를 구축했다.
이로써 해안 및 남부에 살던 무슬림과 대도시의 기독교 소수 종파들까지 신생 레바논에 대거 편입됐다. 모두 18개 종파가 한데 묶이게 되었다. 레바논 건국에 참여하는 모든 종파에게 각료직과 국회 의석수를 종파별로 고정하여 권력을 나눠버렸고 이는 현재 레바논이 가진 모든 문제의 원초적 바탕이 됐다.
종파 대표들은 1932년 시행된 인구조사에 따라 권력을 나누기로 했고 1943년 국민협약에 그 내용을 담았다. 협약은 의회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마론파 기독교도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총리는 수니파, 국회의장은 시아파, 국회 부의장과 외교장관은 그리스정교, 국방장관은 드루즈파가 맡도록 못을 박았다. 국회 의석수는 기독교와 이슬람을 6대 5의 비율로 고정했다. 이른바 신앙 정체성에 입각한 ‘종파주의’ 또는 종파 간 ‘연합주의’라 불리는 독특한 레바논식 민주주의다. 모자이크 민주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국민협약은 권력구조뿐 아니라 국가 성격을 서양과 동양,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는 동서 문명의 화합으로 상정했다. 이에 따라 1943년 의회민주주의 공화정 세속국가 레바논이 출범했다. 후견국을 자임한 프랑스도 고무되었다. 중동의 신생국 중에서 유일하게 종파 간 공존이 명문화된 레바논은 중동의 모델 국가가 될 것이라 침튀기며 찬미했다. 그러나 형식적인 아름다움이 내면의 골을 메우지는 못하고 내부 갈등은 레바논 내전의 도화선이 된다 .
이집트 혁명(1952)과 수에즈 전쟁(1956)으로 아랍 민족주의가 유행하고 이스라엘의 탄압을 피해 대규모 팔레스타인 난민이 국경을 넘어 레바논으로 유입되었다. 팔레스타인 난민 유입과 무슬림의 높은 출산율로 인하여 급증한 이슬람으로 인구구성의 변화는 레바논에 권력불균형을 초래했다. 기독교인이 줄고 무슬림, 특히 시아파 인구가 늘어났다.
레바논은 기독교와 이슬람, 범아랍주의와 소레바논주의, 우익과 좌익이 겨루는 혼란상황이었지만 집권 세력인 마론파 기독교 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양보하면서 타협하고 국정을 안정시킬 마음이 없었다.
국민협약의 본질은 분쟁을 막기 위해 종파별로 권력을 분점하되 특정 정파의 편파적 이익 추구를 막고 국가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하자는 데 있었다. 계약에 따라 다원적 정치체제의 균형과 질서 그리고 안정을 추구하자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초월적 신앙고백에 근거한 종파 간의 간극은 컸다. ‘레바논’이라는 국가 정체성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종교는 오랜 세월 이어진 끈끈한 정체성이었다. 이 와중에 인구변화가 생겨나니 사달이 난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외세의 개입이었다. 각 종파들이 해외의 자기 종파와 연대하며 종파를 고리로 레바논 분쟁이 국제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중동 분쟁의 대표적 두 골치거리가 레바논을 부서버린다. 첫째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레바논이 말려들면서 시작된 내전으로 1975년부터 1990년까지 베이루트가 초토화됐다. 둘째는 이란을 중심으로 한 시아파의 공세적 개입과 레바논에 기반을 둔 이슬람 시아파 정치·군사 조직 헤즈볼라의 문제다. 이란이 뒷배이기에 해결될 수 없는 무장 단체가 레바논 정치 상황을 완벽한 카오스의 지옥으로 만들었다.
레바논 내전은 종파 균열이 불거지던 1970년대 초, 베이루트 외곽 난민촌에 자리 잡았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무장세력을 레바논 시아파 무슬림이 지원하면서 충돌이 발생하자 기독교 우파 세력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불러들였다. PLO는 베이루트와 레바논 남부를 근거지로 1974년 4월 Kiyat Shmona 학살, 5월 Ma’alot 학살을 비롯한 대 이스라엘 테러활동을 거듭했고 이스라엘은 공군이나 특수부대를 투입해서 레바논 남부 및 베이루트를 수시로 공격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의 개입은 다시 레바논 내에서 분쟁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75년 4월 베이루트 외곽에서 무장 충돌이 일어나며 내전이 시작됐고 이스라엘은 물론 시리아까지 개입했다. 이후 이스라엘이 PLO 소탕을 명분으로 레바논을 들락거렸고 시리아군은 레바논 전쟁 억지를 명분으로 2005년까지 29년간 주둔하며 주권국가 레바논을 마치 식민지처럼 다뤘다.
1982년 이스라엘의 2차 침공은 최악의 상황으로 진행된다.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남부를 거쳐 베이루트까지 진격했다.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팔랑헤)와 함께 PLO의 거점을 파괴했다. 기독교 대통령의 피살 사건으로 기독교 민병대의 보복 공격을 불렀다. 1982년 9월16일 저녁, 기독교 민병대는 베이루트를 장악한 이스라엘군의 묵인 및 공조하에 베이루트 남부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급습 학살로 팔레스타인 난민들과 시아파 레바논인 수천명이 살해당한 ‘사브라 샤틸라 사건’은 중동의 아랍인들이 이스라엘과 레바논 기독교도를 악마처럼 인식하게 된 계기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내전 개입은 9.11 테러의 도화선이다. 사우디의 돈많은 가문의 자식인 빈 라덴이 이스라엘의 침공을 보고 격분해서 이스라엘의 후원자인 미국의 건물을 공격해 그대로 되갚아 주기로 결심하고 이를 기획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면 후원자인 미국을 약화시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 경제를 파탄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1989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연맹이 주도하고 미국이 후원한 타이프 협정이 체결된다. 기독교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국회는 기독교와 이슬람 비율이 5대 5 동수로 바뀌었다. 수니파 총리의 권한이 괄목할 만하게 커졌고, 국회의 위상도 높아졌다. 대통령·총리·국회의장의 권한이 균형을 맞췄다. 이를 ‘3인 대통령 체제’라고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권한의 균형은 곧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 정치 행태로 이어졌다.
두 번째는 이란의 개입과 헤즈볼라 문제다. 1989년 타이프 협정은 종파 간의 갈등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종파 간 갈등이 극심하던 내전 중반기인 1983년부터 헤즈볼라가 힘을 드러냈다. 사브라 샤틸라 사건 이후 PLO가 약화되고 이스라엘도 레바논에서 발을 뺐다. 레바논은 내부 종파의 갈등으로 들끓고 있었다. 이즈음에 ‘혁명 이란’의 후원으로 등장한 강력한 시아파 정당 헤즈볼라는 레바논 내 시아파 집권을 추구하는 무장 세력이다. 1983년부터 헤즈볼라는 일련의 테러 행위로 국제적 범죄 조직으로 낙인된 상황에서 레바논의 환골탈태를 꿈꿨던 하리리 총리를 살해하면서 ‘반(反)헤즈볼라-반(反)시리아’ 시위대가 베이루트 순교광장을 가득 채웠다. 결국 시리아는 국제사회의 압박에 못 이겨 철군을 선언했다. 헤즈볼라도 레바논 정치에서 힘을 잃는 듯 보였다.
그러나 2006년 7월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간 무력 충돌로 레바논 전쟁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뒤바뀌었다. 이스라엘은 33일간 시아파 거점인 남부 레바논과 남베이루트를 초토화시키며 헤즈볼라를 제거하려했지만 이란의 지원을 받으며 버틴 끝에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이스라엘과 미국의 헤즈볼라 제거 목표는 실패한다. 다시 부상한 헤즈볼라는 ‘기독교와 수니파의 친미·친서방 기조는 이스라엘 편들기’라고 질타하며 여론 반전을 주도했다.
이후 아랍의 봄, 시아파 벨트(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의 헤즈볼라) 형성, 내전, IS(이슬람국가:이슬람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테러단체) 등장 등 일대 혼란기를 거치면서 헤즈볼라는 견고한 조직으로 자리 잡게 된다. 밖으로는 이란과 연대하여 시리아 내전과 이라크 등에 개입하면서 투쟁력을 키웠다. 어느 종파도 레바논 전체를 아우르며 국가 공권력과 행정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가운데 헤즈볼라는 자신의 거점인 남부 레바논과 베이루트 남부 등 일부 지역에서 자기들만의 나라를 만들었다.
합리적인 정치체제라고 믿어졌던 레바논의 추락은 종파 사이의 벽 때문이다. 종파적 정체성에 함몰되어 국민국가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다. 1943년 국민협약의 정신은 단순히 싸움을 회피하기 위해 권력을 나눈 것이 아니었다. 물리적 분점을 통해 공존과 대화를 이끌어내어 종국에는 유기적 결합에 이르고자 했던 레바논은 정상적인 국가를 만들지 못했다.
더 큰 비극은 종파 분열을 틈타 외세가 국내정치로 침투한 것이다. 레바논 내 종파 간 대화보다 외국 동일 종파와의 연대가 훨씬 더 강하게 작동하며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특히 중동의 대표적 두 문제인 ‘이팔(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과 ‘이란 주도의 시아파 네트워크’가 레바논 내부로 틈입해 나라를 뒤흔들었다. 레바논은 이팔 분쟁이 폭발하는 장소이자 중동 시아파들이 연대하는 공간으로 전락해버렸다. (글 출처 시사인 2020.08.26 by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 약간의 수정)
1995년 프랑스 출신 미국 예술가 아르망 페르난데스는 레바논 내전 종식을 축하하기 위해 레바논 야르제에 "평화를 위한 희망" (Espoir de Paix, Hope for Peace)기념물을 건축했다. 해당 기념물은 레바논 내전 당시 무너진 건물에 기갑차량 78대를 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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